앤 카슨의 인터뷰와 『빨강의 자서전』, 『녹스』 앤 카슨. Illustration: Niklas Elmehed © Nobel Prize Outrea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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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북레터를 쓰는 지금, 북엔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의 출판사가 책을 소개하고 해외 출간을 논의하는 이곳에서, 올해 주빈국 체코는 ‘바닷가의 나라’를 자처했습니다. 내륙국 체코에 웬 바다냐고요? 셰익스피어가 『겨울 이야기』에 그려놓은 보헤미아 해안을 빌려온 겁니다. 체코 문학을 세계의 ‘이야기의 바다’와 잇겠다는 뜻으로, 자국 작품의 번역과 해외 출간을 늘리려는 이번 행사의 포부를 담았죠. (Czechia 2026, 「Czech Republic, Guest of Honour」) 수백 년 전 희곡 속 지명이 오늘의 체코 문학을 소개하는 말이 됐습니다. 🌊
북레터는 책과 출판 현장을 더 깊이 다루기 위해 구성과 디자인을 손보고 있습니다. 이번 정기호는 개편을 위해 쉬어갑니다. 이번에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앤 카슨을 소개합니다. (스웨덴 한림원, 「Nobelpriset i litteratur 2026」, 2026.10.8) 그의 글쓰기 이야기에 앞서, 신간을 추천해달라는 질문 하나부터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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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주빈국관의 하버 스테이지. 사진: Czechia 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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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전미도서상 시상식의 앤 카슨. 영상: The New York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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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문장부터 막혔다면
2024년 전미도서상 시상식에서 뉴요커를 만난 카슨. 그해 나온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을 묻는 말에 난감해합니다. 고전학자라 주로 기원전 500년 무렵의 책을 읽는다는 겁니다. 그래도 한 권 추천해달라는 부탁에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호메로스, 언제나 호메로스. 신간 추천을 받으러 왔다가 호메로스 영업을 당했습니다. 😅 글쓰기 조언을 묻는 문답은 더 짧고 단호합니다. (뉴요커, 앤 카슨 인터뷰, 2024년 전미도서상 시상식)
받은 조언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받은 적 없어요. 솔직히, 물어보지도 않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해준 조언은?
“중간에서 시작하세요.”
2024년 전미도서상 시상식의 앤 카슨. The New Yorker. 문답 번역: 북레터.
첫 문장을 붙잡고 한참을 보내본 사람에게는 꽤 반가운 조언입니다. 남에게 물어본 적 없다는 사람의 말이라 더 솔깃한 건 기분 탓일까요. ‘중간부터 시작하기’라는 이번 특집의 제목도 여기서 빌렸습니다. 호메로스를 추천한 카슨은 자기 작품에서도 고대 시인들의 글을 다시 읽습니다. 『빨강의 자서전』에서는 스테시코로스가 쓴 게리온의 이야기를, 『녹스』에서는 카툴루스의 애도시를 가져오죠. 체코가 셰익스피어의 해안에 오늘의 뜻을 더한 것처럼, 카슨은 이 옛 글들로 무엇을 새로 썼을까요. 여기서는 그의 조언을 빌려, 이미 누군가 쓰기 시작한 이야기의 중간으로 들어가보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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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한겨레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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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에게 자서전을
『빨강의 자서전』의 서문은 고대 그리스의 시인 스테시코로스가 형용사를 쓰는 법에 주목합니다. 카슨은 호메로스의 시에서 피는 검고 바다는 지칠 줄 모르듯 사물과 수식어가 단단히 짝지어져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스테시코로스는 그 결합을 풀어헤칩니다. 늘 붙어 다니던 말을 떼어내자, 익숙한 대상도 달리 묘사할 수 있게 된 거죠. (앤 카슨, 『Autobiography of Red』 서문, Penguin Random House 공개 본문)
스테시코로스가 다르게 바라본 인물 중에는 게리온이 있습니다. 헤라클레스에게 소 떼와 목숨을 빼앗기는 괴물인데, 그의 시에서는 게리온이 살던 곳과 그를 걱정하는 어머니가 중요해집니다. 영웅이 처리해야 할 과업으로만 알았던 죽음에, 한 가족의 사정이 생긴 거죠. 카슨은 이 시의 남은 조각들을 읽고 게리온을 현대의 소년으로 다시 씁니다. (앤 카슨, 『Autobiography of Red』 서문, Penguin Random House 공개 본문)
학교에 다니고 자서전을 쓰는 게리온에게는 여전히 붉은 몸과 날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소년의 이름은 하필 헤라클레스. 신화에서 목숨을 빼앗던 상대를 사랑하게 된 소년이라니, 이름만 알아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카슨은 이 소년의 이야기를 시로 썼습니다. 원서의 부제도 ‘운문으로 쓴 소설’입니다. (Penguin Random House, 『Autobiography of Red』 작품 소개)
본편 앞의 재창작 단편에서는 바람도 새벽도 꿈도 붉습니다. 붉다는 말이 게리온의 외모를 넘어 그가 사는 세계 곳곳에 붙어요. (앤 카슨, 『Autobiography of Red』 「Red Meat: Fragments of Stesichoros」, Penguin Random House 공개 본문) 서문에서 형용사를 오래 이야기한 작가다운 선택입니다. 신화의 조연에게 주인공을 맡기는 일과 그 인물이 보고 느낄 언어를 만드는 일이, 이 소설에서는 함께 벌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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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와 게리온의 싸움. 기원전 540년경 아티카 도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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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 앤 카슨 지음, 윤경희 옮김, 봄날의책. 사진: 타별, 채널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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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도를 번역하기
『녹스』는 다른 사람의 시를 번역하며 시작한 애도입니다. 카슨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던 형제 마이클을 잃은 뒤, 형제의 무덤을 찾아 먼 길을 떠난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글을 옮깁니다. 라틴어를 한 낱말씩 풀고 그 곁에 편지와 가족사진, 기억의 조각들을 붙였죠. 그렇게 손으로 만든 책 한 권을 복제해 펴낸 것이 『녹스』입니다. (New Directions, 『Nox』 작품 소개)
책의 왼쪽에는 라틴어 낱말과 뜻풀이가, 오른쪽에는 마이클에 관한 기억이 놓입니다. 기억을 뜻풀이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뜻풀이를 기억에 맞게 고쳤다고 해요. (파리 리뷰, 「Anne Carson, The Art of Poetry No. 88」, 2004년 가을호) gentes 항목에는 민족과 인류, 가족을 뜻하는 말들과 함께 ‘밤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제목인 녹스도 라틴어로 밤이라는 뜻이고요. (앤 카슨, 「Nox [gentes]」, Academy of American Poets 공개 본문) 시의 단어를 옮기는 동안, 마이클을 떠올리는 말들이 사전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가족사진에서도 카슨은 평범한 앞모습 대신 뒤편의 그림자를 골랐습니다. 그쪽에 더 많은 진실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해요. 편지의 실제 조각과 어머니의 답장을 붙이고, 라틴어를 적은 쪽은 차에 적셔 오래된 종이처럼 만들었어요. (파리 리뷰, 「Anne Carson, The Art of Poetry No. 88」, 2004년 가을호) 고대의 시와 가족의 기억을 서로 마주 보게 한 구성은 종이의 표면에까지 이어집니다.
책 한 권을 완성했다고 마이클에 대한 의문까지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애도는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카슨이 애도라고 부른 것은 누군가 죽은 뒤 남겨진 혼란으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파리 리뷰, 「Anne Carson, The Art of Poetry No. 88」, 2004년 가을호; 인용문 번역: 북레터) 카툴루스의 시를 옮기는 동안 카슨은 자신의 상실을 담을 책의 모양까지 만든 셈입니다. 카툴루스의 애도시를 번역한 책인 동시에, 카슨이 마이클을 위해 쓴 애도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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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 영문판. © 2010 Anne Carson. New Directions. |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 사진: Universal Pictures / NBCUnivers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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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또 당신입니까
지난 9월호에서는 영화 〈오디세이〉를 본 사람들이 호메로스의 책을 찾아 읽는 모습을 전했습니다. (북레터, 「책 읽을 마음이 커졌어. 막 공룡만해」, 2026.9.6) 이번에는 호메로스를 추천하던 카슨의 수상 소식입니다. 고전이 다시 읽히고 팔리는 현상에 관심을 가져온 우리에게, 카슨의 책은 그 고전을 읽은 사람이 무엇을 새로 쓰는지까지 보게 합니다.
놀런은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고, 카슨은 고대의 시를 읽으며 붉은 소년의 사랑과 자신의 애도를 썼습니다. 고전에서 인물과 이야기를 가져오면서도 그것을 담을 문장과 형식은 새로 만든 것이죠. 스웨덴 한림원도 수상 이유에서 고전 전통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문학 형식을 만들어낸 점을 꼽았습니다. (스웨덴 한림원, 「Nobelpriset i litteratur 2026」, 2026.10.8) 카슨의 수상은 우리가 새 원고에서 찾는 독창성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소재와 줄거리가 낯설어야만 새로운 책일까요. 같은 인물을 어떤 말로 쓰는지, 같은 슬픔을 어떤 형식으로 담는지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책이 나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체코는 셰익스피어가 써놓은 바다에 오늘의 작가들을 소개하겠다는 뜻을 더했습니다. 카슨은 고대의 시에 자기 삶과 언어를 더했고요. 오래된 이야기를 빌려온 뒤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다음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고전이 다시 팔린다는 소식이 반가운 만큼, 그 고전을 읽은 사람이 쓰는 책에도 관심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익숙한 소재를 전혀 다른 문장과 형식으로 쓴 원고가 눈앞에 왔을 때, 우리도 그 차이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카슨의 수상을 축하하는 마음이 아직 이름을 모르는 작가의 다음 책까지 이어지도록요. 📚
11월 첫 주 월요일, 새로 단장한 북레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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