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중고서점들의 주문서에 수상한 주문들이 찍히기 시작했습니다. 잘 안 팔리던 먼지 쌓인 책들부터 최신 도서들까지 수십 종을 한꺼번에 사들이는 주문이었죠. 책값을 깎아달라는 말 한마디도 없습니다. 한 판매자가 이렇게 받은 주문만 약 1,000권. 서로 다른 이름으로 쏟아지는 이런 주문들을 수상하게 여긴 한 판매자는 미디어와 함께 책들의 행선지를 쫓아보기로 합니다. 판매되어 나가는 중고책에 위치추적기 ‘에어태그’를 달기로 한 것이죠.1 위치추적기를 통해 추적된 중고책들의 행선지는 어디였을까요?
책을 파는 출판사라면 묘한 기분이 들 만한 이야기입니다. 책이 팔렸으니 잘된 일일까요? 중고책을 산 돈은 중고 판매자에게 돌아갑니다. 그 책을 디지털 자료로 바꾸어 새로운 서비스에 사용하는 대가는 또 다른 문제죠. 종이책 한 권의 가격에, 그 안의 글을 앞으로 어떻게 이용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들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출판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지점도 판매가 끝난 바로 그 다음부터입니다.
프랑크푸르트 권리장전: “AI 학습에 사용된 작품 밝혀라”
이 문제에 독일 출판계가 내놓은 답은 단호합니다. 지난 10월 발표된 프랑크푸르트 호소문4은 AI 학습에 어떤 저작물이 사용됐는지 공개하고, 권리자가 수익을 정당하게 나누며, 저작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한국출판인회의도 한국어 번역을 공개했습니다. 책이 AI의 재료가 되는 동안, 정작 책을 만든 사람들은 무엇이 어떻게 쓰였는지도 모르는 상황을 바꾸자는 것이죠.
여기서 눈여겨볼 말은 ‘공개’입니다. AI 기업이 책을 학습했다고 해도 어느 출판사의 어떤 판본을 썼는지 알 수 없다면, 저자에게 설명할 수도 이용 조건을 협의할 수도 없습니다. 내 책이 들어갔는지부터 추측해야 하는데 적정한 대가를 논의하기는 더 어렵겠죠. 사용한 작품을 밝히라는 요구는 보상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입니다.
그렇다고 법원이 이미 모든 무단 학습을 같은 결론으로 판단한 것은 아닙니다. 앤트로픽 사건의 2025년 6월 판결3은 해당 사건의 AI 학습과, 구매한 종이책을 한 부의 디지털본으로 바꾸고 원본을 폐기한 이용에 공정이용을 인정했습니다. 반면 불법복제 사이트에서 책을 내려받아 영구적인 자료실에 보관한 행위까지 학습이라는 이유로 정당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책을 어떻게 구했는지와 구한 책을 어디에 썼는지를 따로 본 겁니다.
이틀 뒤 나온 메타 사건의 판단5은 다른 점을 짚었습니다. AI가 비슷한 글과 책을 대량으로 만들어 기존 작품의 시장을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건에서는 저자 13명이 필요한 시장 피해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메타가 이겼습니다. 기업의 승소라는 결과만 읽으면 놓치기 쉬운 대목입니다. 재판부는 저자들이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다고 판단하면서도, 그 결과를 다른 모든 책의 학습 이용이 적법하다는 뜻으로 읽지 말라고 밝혔습니다.
출판사가 준비할 일도 여기서 구체화됩니다. 막연히 ‘우리 책을 배웠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데서 더 나아가, 어떤 작품이 어떤 경로로 들어갔고 어떤 이용이 이루어졌는지 설명할 자료가 필요합니다. 프랑크푸르트의 공개 요구는 그 자료를 AI 기업만 쥐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 제기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개별 판결을 한국의 모든 계약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이용 내역을 확인할 수 있어야 권리와 대가를 둘러싼 논의도 시작된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이 시각 한국에서는.
한국에서도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9월 29일 한국출판인회의와 한국출판연구소, 한국작가회의 등 12개 단체는 「독자를 위한 출판사와 저작자의 AI 사용 원칙」6을 발표했습니다. AI를 활용한 사실과 범위를 알리고 최종 책임은 사람이 지도록 하자는 내용인데요. 기존 출판물을 AI 학습에 이용할 때도 권리자의 동의와 정당한 보상을 전제로 삼았습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법률은 아니지만, 출판사가 AI를 쓰는 입장과 자기 책을 제공하는 입장에서 지켜야 할 기준을 함께 제시한 셈입니다.
한편 대한출판문화협회가 9월 29일 회원사에 보낸 MOU 신청 안내에는 AI 학습용 데이터를 함께 공급할 출판사를 모으는 구상이 담겼습니다. 제공할 의향이 있는 도서 목록을 취합하고 협회가 AI 수요처와의 계약과 협상을 일괄 대행하겠다는 내용인데요. 안내된 MOU는 별도 비용 부담이나 법적 구속력이 없는 참여 의향 확인용입니다. 서명하는 즉시 책을 넘기거나 학습 이용을 허락하는 계약은 아니라는 뜻이죠.7
무엇을 허락할지 결정할 수 있어야 거절도 거래도 가능합니다. 무단 이용에 반대하면서 조건을 정해 이용을 허락하는 일은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관건은 ‘동의를 받았다’는 한 줄에 얼마나 구체적인 약속을 담느냐겠죠.
예를 들어 한 출판사가 오랫동안 판매해 온 책을 제공하려 한다고 해봅시다. 그 출판계약이 AI 학습 이용까지 다룰 수 있는지, 번역과 삽화의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몇 년 동안 어떤 모델을 학습시킬 것인지, 다른 회사에도 데이터를 넘길 수 있는지에 따라 허락의 범위가 달라집니다. 출판사가 가진 파일을 보내는 일과, 그 파일에 담긴 모든 저작물의 이용을 허락할 수 있는지는 따로 확인해야 하는 겁니다.
공공사업에서도 이용 조건을 나누려는 시도는 있습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의 2025년 데이터 공급기관 모집 공고8는 도서와 문제집을 제공하는 기관에 적법한 권원을 요구했습니다. 활용 요건의 예로는 비상업적 이용으로 한정하고, 추후 상용모델화 때 별도로 협의하는 조건을 들었는데요. 실제 참여한 모든 저자의 동의를 확인한 사례는 아니지만, 연구와 상업적 이용의 조건을 나누어 정할 수 있게 한 접근은 참고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가격은 어디서부터 정해야 할까요? 출협은 10월 30일 보도자료9에서 2023년 말뭉치 사업을 둘러싼 분쟁의 합의금액을 새로운 AI 데이터 거래의 일반적인 가격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금액에는 공공 언어자원 구축이라는 목적과 분쟁을 빨리 끝내려는 사정, 과거 침해와 장래 이용을 함께 정리한 조건이 들어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새로 생기는 시장에 공개된 거래 사례가 드물다 보니, 그런 합의금이 어느새 ‘시세’처럼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죠.
이 차이는 출판사에 작지 않습니다. 오래 끌어온 분쟁을 끝내기 위해 받아들인 금액과, 앞으로 책을 어떤 사업에 쓰도록 허락할 때의 금액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연구용으로 제한된 기간에 쓰는 자료와 여러 기업의 상업 서비스에 계속 들어갈 자료를 같은 단가로 비교하기도 어렵습니다. 출협의 일괄 협상이 의미를 가지려면 책을 많이 모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런 이용 조건의 차이를 가격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도비랑 똑같은 제품을 무료로 쓸 수 있다고요?
이제 출판사가 책을 만드는 쪽으로 잠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포토샵과 인디자인 같은 프로그램을 무료로 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매달 구독료를 내는 제작 실무자는 한 번쯤 멈춰 보게 되겠죠. 어도비 제품이 무료로 풀렸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AI의 도움을 받아 어도비 앱을 대체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ArtCraft 이야기인데요. 그중 DesignCraft10는 인디자인을 대체하겠다는 조판 프로그램으로, 무료 이용과 소스 공개12를 내세웁니다.
개발진이 설명하는 방식은 ‘클린룸 재구현’입니다. 실행되는 프로그램의 동작을 관찰하고 필요한 기능을 새 코드로 구현한다는 뜻인데요. 공개된 개발 규칙11은 프로그램 내부를 읽거나 역어셈블해 복사하는 일, 어도비의 시각 자산을 복제하는 일을 금지합니다. 같은 기능을 만들겠다는 목표와 기존 코드를 가져다 쓰는 행위를 구별하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개발진이 공개한 방침이며, 실제 개발 과정 전체가 그 방침을 지켰는지까지 독립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한 겹의 질문이 더 남습니다. 코드를 새로 작성하도록 도운 AI는 무엇을 배우고 왔을까요? 완성된 프로그램의 소스를 공개했다고 해서, 그 AI 모델의 학습 자료와 이용허락까지 함께 공개되는 것은 아닙니다. 클린룸이라는 설명이 답하는 범위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확인하지 못한 학습 이력을 근거로 이 프로그램이 침해의 결과물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도구가 나오는 일은 출판사에 반가운 변화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늘어나면 한 업체의 가격이나 정책에 종속될 이유도 줄어듭니다. 저작권을 지킨다는 이유로 기능을 새롭게 구현하는 경쟁까지 모두 막자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비용이 내려간다는 기대만으로 개발자가 무엇을 가져다 썼고 무엇을 새로 만들었는지 묻는 일까지 생략해서도 안 되겠죠.
가져가기는 쉽고 증명하기는 어려워.
누가 무엇을 가져갔는지 알아내는 일부터가 쉽지 않습니다. 책을 스캔했다는 사실을 확인해도 그 파일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또 다른 문제고, 프로그램의 소스를 볼 수 있어도 그것을 만든 AI가 무엇을 학습했는지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저자와 출판사가 그 경로를 따라가려면 이용한 기업이 가진 자료가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허락과 대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자기 책이 쓰였다는 사실부터 찾아야 하는 셈입니다.
앞으로 맺을 데이터 공급 계약에서는 이 순서를 바꿔볼 수 있겠죠. 책을 건네기 전에 어떤 작품을 어디에 쓸 것인지 밝히고, 제공한 뒤에도 약속대로 쓰였는지 확인할 방법을 함께 정하는 겁니다. 제공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 저자와 확인하는 일도 함께 필요합니다. 기간과 이용 범위, 대가와 정산 방법은 이런 조건들과 맞물려 있을 테니까요.
책 속에 에어태그를 넣어야 겨우 행선지를 알아내는 일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야 합니다. 출판사가 자기 책의 쓰임을 확인하는 방법까지 그래서는 곤란하겠죠. 출협의 양해각서가 실제 공급 계약으로 이어질 때도, 어떤 책을 어디에 쓰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 내용을 알아야 저자와 출판사가 어디까지 허락하고 얼마를 받을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진주문고 평거동 본점에는 1층부터 3층까지 분야와 주제별로 책을 모은 서가가 있다. 북카페 진주커피와 생활갤러리 아트스페이스진주, 문화공간 여서재와 세미나실도 함께 운영한다. 책을 고르는 자리 곁에 전시를 보고, 읽은 책을 놓고 이야기할 자리를 마련한 서점이다. 1
여서재의 프로그램에는 독자의 목소리도 들어간다. 8월 17일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진주사람 허수경, 우리들의 시인 허수경」은 유고 시집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의 출간을 기념하는 낭독회다. 김민정 시인에게 유고집의 시작과 끝을 듣는 시간과, 독자가 허수경의 시 여덟 편을 읽는 시간을 엮은 구성이다. 2
성냥갑 350개가 한 권의 책이 된다. 더북소사이어티가 소개한 『Striking! Advertising Matches from Singapore』는 싱가포르의 광고 성냥갑을 모아 도시의 시각문화를 기록한 책이다. 이를 만든 출판 스튜디오 In Plain Words의 작업은 음식과 디자인, 일상의 조사에서 책의 재료를 찾는다. 현대미술과 디자인, 독립출판을 중심으로 책을 고르는 이 서점의 관심이 작은 인쇄물 한 장에도 닿아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1
출판사 미디어버스와 함께 형성된 더북소사이어티는 전시와 출판 프로젝트도 기획한다. 올해 3월 25일 서촌을 떠나 회현에 새 공간을 열었다. 7월 전시로 기획한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생긴 일」은 한 회사의 형식을 만들어 온 생각과 말, 제안과 시행착오를 함께 살핀다. 완성된 결과물에 이르기 전의 작업도 전시의 소재가 된다. 23
여기 공중전화 앞에 선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가 찾아 누르는 번호는 휴대전화 연락처에도 없습니다. 가명과 이니셜을 적은 종이 메모에 따로 보관한 번호죠. 공중전화에 식당 전화, 다른 부서 직원의 휴대전화까지 동원해 연락한 이들은 만나서 종이값을 정했습니다. 얼마를 올릴지, 언제부터 적용할지 합의를 마치고 나면 거래처에 먼저 알릴 회사도 정해야 했습니다. 순서를 정하지 못할 때는 동전이나 주사위를 던졌고요. 지난 4월 공정위가 공개한 여섯 제지사의 담합 수법입니다.1
가격을 올리고 할인은 줄이고
한솔제지와 한국제지, 홍원제지, 무림그룹 3사의 영업담당 임원급은 2021년 2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60회 넘게 모였습니다. 기준가격을 올리기로 한 합의가 두 차례, 거래처에 적용하는 할인율을 줄이기로 한 합의가 다섯 차례였습니다. 할인이 늘어 가격이 내려가자 다시 할인율을 줄이는 데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와 전쟁, 환율 상승으로 제조원가가 오른 시기였지만, 원가 부담을 거래처에 얼마나 넘길지는 경쟁사들이 함께 정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기간 인쇄용지의 평균 판매가격은 71% 올랐습니다.1
출간을 미뤘다는 말, 찍을 부수를 줄였다는 말이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종이값이 올라 어쩔 수 없다고. 독자를 만날 책을 줄이는 일은 출판사가 감당하고, 그 값을 정한 과정은 제지사들만 알고 있었던 셈이죠. 이번 사건에서 출판계가 분노할 대목은 여기에 있습니다. 종이값을 정하는 동안에는 철저히 숨겼던 합의의 대가를, 책을 만드는 쪽이 치르고 있었으니까요.12
공동소송에 나선 출판계
공정위가 발표한 과징금은 3,383억 원 규모였습니다. 큰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이는 자진신고 감면 등을 적용하기 전 금액입니다. 한솔제지는 이후 공시에서 당초 부과된 약 1,426억 원의 납부가 면제됐다고 밝혔습니다. 제재가 발표된 뒤에도 출판사가 담합으로 더 부담한 용지대금을 되찾는 일은 남았습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와 한국출판인회의 등 20개 단체가 공동소송 추진위원회를 꾸리고, 법무법인 지향을 대리인으로 선정한 이유입니다. 현재 첫 소장 접수를 준비하며 참여 출판사의 위임과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1346
출판사들이 한데 모여 소송을 준비한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따로 받아든 가격 인상 통지가 사실은 같은 합의에서 나왔고, 각자 감당했던 부담이 하나의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공동소송에서는 흩어져 있던 거래의 기록을 모아 제지사들이 더 받은 금액을 따지게 됩니다. 얼마를 돌려받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출판계가 제지사들의 가격 결정에 공동으로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6
종이값을 다시 정하라
공정위는 과징금과 함께 가격을 다시 정하라는 명령도 내렸습니다. 지난 4월 발표 당시, 마지막 담합 이후 전체 거래처에 적용하는 기준가격이 바뀌지 않아 합의의 영향이 남아 있다고 본 겁니다. 각 회사가 독립적으로 가격을 다시 결정하고, 3년 동안 반기마다 변경 내역을 보고하도록 한 이유입니다. 이 명령에는 출판계가 주목할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담합을 적발해 과징금을 매겨도, 그때 정한 가격이 남아 있다면 이후의 책에도 같은 부담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1
추진위원회와 법무법인 지향은 이 명령을 둘러싼 행정소송에서도 공정위 측 보조참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손해배상 청구와 함께 가격 재결정이 제대로 이뤄지는지도 감시하겠다는 겁니다. 출판계로서는 두 일 가운데 어느 하나를 뒤로 미루기 어렵습니다. 이미 부담한 대금의 회복도 필요하지만, 그 사이에도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이번 공동대응의 성과는 돌려받는 돈과 함께, 제지사들이 앞으로 어떤 가격으로 거래하는지에서도 확인돼야 합니다.6
어라운드 매거진과 산돌구름, 오늘의집까지, 지금 가장 주목 받는 북디자이너, 상록의 함지은. 붉은 표지의 『2666』부터 파란 바탕의 폴 오스터 컬렉션, 초록색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까지. 열린책들의 여러 책이 그의 손을 거쳤다. 2025년 독립해 문을 연 상록에서는 시집 『진심의 바깥』으로 첫 작업을 선보였다.
『진심의 바깥』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리커버
『2666』 특별 합본판
열린책들 35주년 중단편 세트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베르베르 한국어판 30주년 특별판
폴 오스터 컬렉션
『두루미 아내』
작품 설명
『진심의 바깥』 (2025)
시집의 긴 판형과 표지, 띠지를 함께 설계했다. 초록과 주황의 띠지를 벗기면 제목이 사라지고 꽃을 형상화한 그래픽만 남는다. 독립 후 상록의 이름으로 선보인 첫 작업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리커버 (2025, 을유문화사)
세 권의 표지에서 작가의 사진과 길쭉한 글자의 비중을 조율한 리커버다. 채택되지 않은 표지안은 책배에 은색 후가공을 한 양장 노트 세 권으로 이어졌다.
『2666』 특별 합본판 (2023, 열린책들)
다섯 권의 소설을 한 권으로 합치며 20×28cm 판형을 택했다. 붉은 표지의 인물들은 펜과 잉크로 직접 그렸고, 가죽을 닮은 표지 재료와 은색 책배가 두께를 드러낸다.
열린책들 35주년 중단편 세트 (2021, 열린책들)
종이를 손으로 잘라 만든 그래픽과 커다란 숫자로 스무 권과 두 상자를 묶었다. 책마다 원고에서 색을 찾고, 기본 인쇄색과 별색을 어떻게 겹칠지 계산해 서로 다른 표지를 만들었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 (2024, 열린책들)
앞표지는 글자만으로 구성하고 뒷표지에 작은 흑백 이미지를 놓았다. 서로 출처가 다른 이미지의 질감을 맞추고, 코팅하지 않은 표지와 가벼운 내지로 종이의 감촉을 살렸다.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2023, 열린책들)
초록색 면을 바탕으로 검은 글자의 크기와 방향을 달리했다. 표지와 책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미지에서는 글자가 면을 나누고 채우는 방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베르베르 한국어판 30주년 특별판 (2023, 열린책들)
기존 양장을 유연하고 가벼운 장정으로 바꾸고 굵은 글자와 그래픽을 입혔다. 세트 상자의 윗부분을 뜯으면 『개미』의 첫 문장이 나타난다. 포장을 여는 동작에서 읽기를 시작하도록 한 장치다.
폴 오스터 컬렉션 (2022, 열린책들)
파란 면 위에 노란 작가 이름과 빨간 도형을 크게 놓았다. 단순한 도형의 윤곽과 글자 크기가 여러 권의 표지를 한 컬렉션으로 이어 준다.
『두루미 아내』
표지에 쓰인 그림과 탈네모틀 제목을 맞추고 파란색 별색으로 인쇄한 작업이다. 산돌구름 인터뷰는 편집자와 함께 인쇄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도 보여 준다.
함지은 북디자이너의 작업에는 색과 글자를 크게 쓰는 대담함이 있다. 폴 오스터 컬렉션의 파란 표지에는 노란 작가 이름과 빨간 도형이 큼직하게 들어간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리커버에서는 작가의 얼굴을 바짝 당긴 흑백 사진 위로 길쭉한 글자들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엇갈린다. 색과 글자가 서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표지에는 조금은 키치한 즐거움이 있다.
상록의 첫 작업인 시집 『진심의 바깥』은 길쭉한 판형에 초록과 주황의 띠지를 둘렀다. 강한 배색에 먼저 시선이 머물지만, 띠지를 벗기면 책의 인상도 달라진다. 제목이 사라진 자리에는 꽃을 형상화한 그래픽만 남는다. 함지은은 산돌구름 인터뷰에서 시집 자체를 시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제목을 읽고, 띠지를 벗기고, 다시 표지를 보는 동안 한 권의 시집이 두 가지 얼굴을 보여주는 셈이다. 1
“제 손이 닿은 모든 책이 가능하면 다른 사람이 만든 것처럼 보였으면 좋다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어라운드 인터뷰에서 함지은이 한 말이다. 강한 원색과 커다란 글자를 쓰다가도, 모노 에디션에서는 흰 바탕에 작은 흑백 이미지 하나를 놓는다. 그가 작업의 원칙으로 꼽은 것은 원고를 꼼꼼히 읽고 그 안에서 시각적인 요소를 찾는 일이다. 먼저 책의 내용을 읽고, 거기에 어울리는 사진과 그래픽, 드로잉을 고른다. 작품들을 나란히 놓았을 때 서로 다른 디자이너의 책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바라는 결과이기도 하다. 2
손에 쥐었을 때 완성되는 책
『2666』 특별 합본판에서는 책의 크기와 무게감부터 인상적이다. 다섯 권으로 출간됐던 소설을 한 권으로 묶으며 판형을 크게 키웠다. 가죽을 닮은 붉은 표지 위에는 펜과 잉크로 직접 그린 인물들이 빼곡하고, 두툼한 책배에는 은색 후가공을 더했다. 방대한 소설의 압도감을 장정에서도 전하려 했다는 함지은의 설명처럼, 표지를 정면에서 볼 때와 책을 옆으로 돌려볼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1
모노 에디션은 종이의 질감을 살린 작업이다. 표지에 코팅을 하지 않아 종이의 감촉이 손끝에 그대로 전해진다. 손때도 묻을 수 있다. 내지에는 평량이 가벼운 종이를 써서 책장이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했다. 『2666』이 두께와 은색 책배로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모노 에디션은 가벼운 종이와 간결한 장정으로 손에 다가온다. 같은 디자이너의 책이라도 쥐고 펼치는 감각은 이처럼 다르다. 3
마음에 드는 표지를 저장해 두었는데, 정작 무슨 폰트인지 몰라 비슷한 글꼴만 한참 찾은 적 있나요? Fonts In Use는 실제 인쇄물과 화면에 쓰인 서체를 모아 놓은 아카이브입니다. 책, 잡지, 포스터처럼 매체별로 둘러볼 수도 있고, 서체 이름을 따라가며 같은 글자가 다른 작업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비교할 수도 있어요. 표지만 보고 끝나지 않고 내지와 장의 첫 페이지까지 이어지는 사례도 있습니다.
10월 26일 올라온 임재형의 작품집 『Blank Reading (A Second Life)』이 좋은 출발점입니다. 파사주가 디자인한 이 책에는 제목의 Moulin, 영문 본문과 곁글의 Terza Reader, 한글의 산돌 명조Neo1이 함께 기록돼 있어요. 한글과 영문을 함께 다루는 책을 준비한다면, 서체 이름을 수집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각 글꼴이 맡은 역할을 살펴볼 만합니다. 12
『Blank Reading (A Second Life)』. 출처: Fonts In Use.
그림 한 장이 필요해 검색을 시작했다가, 뜻밖의 책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The Public Domain Review는 여러 도서관과 아카이브에 흩어진 책과 이미지에 해설을 붙여 소개해요. 컬렉션에서 책, 이미지 같은 자료 종류를 고르거나 시대와 주제를 좁히면, 익숙한 검색어 밖의 자료도 만날 수 있습니다.
가령 『Metamorphosis』를 다룬 글에서는 접힌 종이를 넘길 때 그림이 달라지는 옛 책을 여러 판본으로 살펴봅니다. 사자가 그리핀으로, 다시 독수리로 바뀌는 식이죠. 어떤 이미지를 쓸지 고민하던 편집자에게는 종이를 접고 넘기는 행위 자체가 서사가 될 수 있다는 단서입니다. 소개글에 연결된 소장처와 디지털 원본까지 따라갈 수 있어, 발견한 이미지를 나중에 다시 찾기도 좋습니다. 34
『Metamorphosis』(1836). 출처: The Public Domain Review.
만화 편집자 김해인은 책날개가 궁금해 디자이너와 제작부에 말을 건다. 자신은 앞표지 다음으로 들여다보는 곳인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 심드렁하다. 채널예스 칼럼 「책날개에서 만나요」는 그 작은 서운함에서 시작한다. 작가의 이력을 얼마나 자세히 쓸지, SNS와 연재처를 어떻게 연결할지, 완결권에 남은 몇 줄의 작가의 말이 왜 뭉클한지. 늘 만들면서도 따로 말할 기회가 적었던 책의 한 부분을, 좋아하는 만화를 펼쳐 보이듯 풀어낸다.1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에는 놓친 작품을 향한 미련도 숨기지 않는다. 갖고 싶었던 『리버스 에지』를 다른 출판사가 펴냈을 때의 아쉬움은 표지와 본문 서체에 대한 감탄으로 이어지고, 곧 자신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돌아보는 말이 된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와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한 사람 안에서 티격태격하는 글이다. 편집의 판단과 망설임을 이야기로 읽고 싶다면 그의 에세이와 만화 칼럼을 함께 펼쳐볼 만하다.2
그만 쓰겠다는 제자 앞에서 소설가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최정화의 「경쟁 아닌 것들의 경쟁」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는 학생의 인사에서 시작한다. 계속 써보라고 붙잡기에는, 자신이 글을 쓰며 치러온 대가를 너무 잘 안다. 그런데 망설이던 입에서 나온 것은 열심히 하지 않을 거라면 수업에 오지 말라는 말이다. 제자를 걱정하다 도리어 윽박지른 순간을 숨기지 않는 고백이 이 글을 팽팽하게 만든다.3
자신이 받았던 응원은 떠오르는데, 정작 제자에게 건넬 말은 없다. 이 대목을 지나면 원고를 기다리는 쪽에서도 쉽게 꺼내던 격려를 잠깐 되짚게 된다. 최정화가 들려주는 아침 풍경은 더 소박하다. 그는 불안을 달래려고 꿈에서 엄마가 건넨 물병을 좋은 징조로 해석해보다가, 결국 휴대전화로 댄스곡을 틀어 기운을 낸다. 제자를 다그치던 소설가의 목소리 뒤로, 음악에 기대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겹쳐 보인다.
『모순』, 『급류』, 『절창』. 지난 8월 청년문화예술패스에 도서가 들어온 뒤, 예스24의 첫 한 달 집계에서 가장 많이 선택된 책은 이 세 소설이었습니다. 열아홉, 스무 살 이용자들의 패스 구매 도서 가운데 소설과 시, 희곡은 45%를 차지했습니다. 공연과 전시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패스에서 책도 자리를 얻었고, 청년들은 문학으로 응답했습니다. 도서 지원을 기다려 온 출판계에도 반가운 소식입니다.1
그림책에 붙은 독자 연령
그런데 청년문화예술패스에는 방향이 뒤집힌 ‘19금’이 있습니다. 열아홉, 스무 살을 위한 제도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은 빠지는 겁니다. 지원 범위를 ISBN 부가기호상 교양서와 전문서로 한정하면서 아동서로 등록된 그림책과 청소년 도서는 제외했습니다. 23
소설을 지원하는 제도에서 청소년 소설은 빠집니다. 같은 문학이어도 청소년 도서로 분류되면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죠. 출판사가 독자층을 구분하려고 붙인 기호가, 이 제도에서는 청년이 지원받아 읽을 수 있는 책의 범위를 정합니다. 청년의 문화생활을 넓히려는 제도에서 책이 겨냥한 독자층까지 제한할 필요가 있을까요.
서점에서 고른 책도
참여 동네서점에서 패스를 쓰려면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하고 매장에서 받아야 합니다. 서가를 둘러보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해도 현장에서 패스로 결제할 수 없어 온라인 주문을 다시 거쳐야 하죠. 동네서점의 진열과 추천을 보고 책을 고르는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절차가 하나 더 생깁니다.4
아동서로 분류된 그림책과 청소년 문학을 다시 살펴보고, 서점에서 발견한 책을 고르는 과정까지 이어 준다면 패스의 독서 경험도 지금보다 다양해질 여지가 있습니다. 책을 지원한다는 변화가 반가운 만큼, 아동·청소년 도서에 걸린 이 엉뚱한 ‘19금’도 오래 남지 않았으면 합니다.
청년문화예술패스, 「자주 묻는 질문(FAQ)」 중 도서의 오프라인 서점 결제 안내. 2026.11.02 확인.
국내외 수상
제41회 만해문학상
수상 발표 2026.10.02.
김애란 『안녕이라 그랬어』, 만해문학상 본상
제41회 만해문학상 본상. 수상 발표 2026.10.02. 김애란 지음, 문학동네, 2025.06.20. ISBN 9791141602376.3
수록작 「홈 파티」2에는 오래 연기해온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에게도 다른 사람의 삶을 자기 몸으로 살아내는 일은 어렵습니다. 타인의 사정을 알고 있다고 여겼다가도 다시 머뭇거리게 되는 순간이죠.
제41회 만해문학상 본상에 선정된1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는 돈과 부동산의 힘이 인물들의 삶에 스며든 모습을 붙잡은 소설집입니다. 심사위원들은 이를 섬세하게 드러낸 사실주의 서사에 주목했습니다. 「홈 파티」의 한 대목과 심사평을 나란히 읽으면, 사회를 이야기하는 소설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가가는지도 드러납니다.
정병호 『긴 잠에서 깨다』, 귀향까지의 시간을 기록하다
제41회 만해문학상 특별상. 본상과 같은 2026.10.02 발표. 정병호 글과 구술, 푸른숲, 2025.12.08. ISBN 9791172540975.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셔오는 길에는 서로 다른 생각이 부딪혔습니다. 유골을 화장하려는 종교적 관습과 조사와 보존의 필요가 엇갈렸고, 함께한 한일 청년들의 참여 이유도 같지 않았습니다. 만해문학상 특별상에 선정된4 정병호의 『긴 잠에서 깨다』에 담긴 기록입니다.
정병호가 2024년 세상을 떠난 뒤, 동료와 제자들은 그가 남긴 구술녹취록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공개된 발췌에는 발굴을 약속하고도 당장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사정, 서로 다른 동기로 모인 청년들이 함께 생활하며 가까워지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유골 115구의 귀환이라는 결과 곁에, 그 일을 가능하게 한 관계와 망설임도 남겨둔 책입니다.5
2026 독일도서상. 수상 발표 2026.10.05. Shida Bazyar 지음, Kiepenheuer & Witsch, 2026.09.03. ISBN 9783462005011.7
죽은 화자가 어린 시절 난민으로 살았던 마을을 돌아봅니다. 아이들이 놀던 장소에는 주민들이 입에 올리지 않는 과거가 겹쳐 있죠. Shida Bazyar의 『Die Lücken』은 이렇게 시작해, 한 마을의 거의 100년에 걸친 시간을 여러 사람의 시선으로 풀어냅니다. 이 소설이 2026 독일도서상을 받았습니다.6
심사위원회는 사라진 유대인 이웃과 이주민의 소속 문제를 마을의 무관심과 연결한 데 주목했습니다. 누가 이웃으로 기억되고 누가 이야기에서 빠지는지, 낯익은 공간을 다시 보게 하는 소설입니다. 출판사가 공개한 영어 샘플8로 그 첫 장면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2026 노벨문학상 작가 수상, 발표 2026.10.08. 위 표지의 국내 번역서: 앤 카슨 지음, 황유원 옮김, 『플레인워터』, 난다, 2025.09.15. ISBN 9791194171850.
2026년 노벨문학상9은 캐나다 작가 앤 카슨에게 돌아갔습니다.11 그의 글에서는 고전 연구와 시, 에세이가 자주 한자리에 놓입니다. 고대 신화 속 괴물 게리온을 한 소년으로 다시 쓴 『Autobiography of Red』, 세상을 떠난 오빠를 기억하는 사진과 편지를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책에 담은 『Nox』가 그런 작업입니다. 문장의 형식과 책을 읽고 펼치는 방식이 함께 달라집니다.10
국내에는 난다가 펴낸12 『에로스, 달콤씁쓸한』,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짧은 이야기들』, 『플레인워터』가 있습니다. 황유원이 옮긴 『플레인워터』13에도 시와 산문, 고대 시인의 번역과 상상의 인터뷰, 여행기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한 작가를 시인이나 에세이스트 한쪽으로만 소개하기 어려울 때, 서로 다른 형식의 글을 한 권으로 묶어낸 이 책은 그의 작업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